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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관련/등산

천태산(11, 2, 20)

by 곽영전 DS3CUF 2015. 12. 23.

 

늘어지게 잠을 자도 되는 ...
그런 날...
아침 일찍 산에 가자는 사람이 곁에 여러명이다.
그래서...............
ㅎㅎㅎㅎㅎㅎㅎ
가까운 천태산에 다녀 왔다.
덕분에 휴일을 뜻 깊게 보낸 그런 날................
처조카들이 들이 닥쳐서
고모부 산에 가자고....

천태산 가는길에 다리위에서 한컷.... 멀리 갈기산이 보인다.

천태산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일요일에 산행한지가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많은 차량들이 이상하게 보인다.

영국사
소재지 :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이 사찰은 신라 문무와 8년(668)에 창건하였다 하나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
고려 문종때 개각국사가 이름을 국청사라 일컬었고, 고려 고종때에는 금당을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내습을 피하여 이곳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하였으므로 이름을 영국사라 고쳤다고 한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표계 맞배집인데 공포는 내,외삼출목으로 쇠서 위에 연화를 조각한 조선 후기의 수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장방위에 놓이는 평방은 건물의 측면 앞쪽에만 짧게 놓여 이 지방의 특징인 다표계 맞배집을 꾸미는데 흔히 볼 수 있는 구조형식을 취하고 있다.

영동 영국사 대웅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61호
소재지 :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이 건물은 주존불로 석거여래좌상을 모신 불전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집으로, 현재의 건물은 조선 중기 이후의 것으로 고종 30년(1893)과 1934년에 중수하였다.
1980년에 해체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 절은 원각국사가 신라 법흥와 14년(527) 또는 문무와 8년(668)에 창건하였다고도 하지만 모두 믿기 어렵다.
고려 문종때 대각국사가 국청사라 했으나. 공민왕이 난을 피하여 이곳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하였으므로 영국사라 했다고 한다.
경내에는 보물 제534호로 지정된 원각국사비가 있다.
영국사 삼층석탑
보물 제533호
소재지 :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영국사 경내
이 탑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일반형 석탑으로서, 2중기단 위에 3층으로 만든 몸돌을 세운 것을 특징으로하고 있다.
원래 옛 절터에 넘어져 있던 것을 1942년 주봉조사가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고, 현재의 대웅전 건물이 향하고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탑을 옮겨 세울 때 2중기단의 위층과 아래층이 바뀌었던 것을 2003년 문화재 보수정비 사업 때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신라 말(10세기경)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재료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상륜부의 각 구조물에 쓰인 재료는 모두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통일신라 하대 탑 중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국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223호
이 나무는 높이가 31m, 가슴 높이의 둘레는 11m이며, 나이은 대력 1000년쯤으로 추정된다.
가지는 2m 높이에서 갈라졌으며, 동서 방향으로 25m, 남북 방향으로 22m 정도 퍼져 있다.
서쪽 가지중 하나는 밑으로 자라서 끝이 땅에 닿았는데, 여기서 자라난 새로운 나뭇가지는 높이가 5m 이상이나 되고, 가슴 높이의 지름이 0.2m가 넘는다.
이 은행나무는 국가의 큰 난이 있을 때에는 소리를 내어 운다고 하며, 이 나무 바로 옆에는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어 충분한 수분을 공급받고 있다.
가을에는 이 은행나무와 주변의 경관이 하나로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며, 격년마다 많은양의 은행이 열린다.

운 좋게도 내가 찾은 이날에는 마른하늘에 무지개가 뜨는 기현상이 있었다.
일요일이라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고개들어 하늘을 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우연히 내가 보게 되어 "무지개다!" 라고 소리쳤더니
ㅎㅎㅎㅎㅎ 많은 사람들이 신기해 하는 모습이었다.

천태산과 영국사
천태산은 고려시대 천태종의 본산이었기 때문에 산 이름도 "천태"가 된 영동의 명산으로 '충북의 설악'이라 불릴 정도로 산세가 빼어나며, 뛰어난 자연경관
과 잘 정리된 등산로, 그리고 주변에 이름난 명소가 산재해 있어 등산 동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여름철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기암과 각종 수목의 푸름과 단풍이 절정을 이루며, 천년사팔인 영국사가 자리잡고 천년역사의 숨결이 곳곳에
배여 있다.
주차장으로부터 약 1km정도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영국사라는 오래된 절이 나오는데 이 절에는 고려조 공민왕의 발자취가 서리어 있다.
서기 1361년(공민왕 10년) 11월 원나라의 한산동을 두목으로 하여 일어났던 홍건적의 난을 피하기 위해 공민왕은 노국공주와 대신들을 데리고 피난의 길을
떠났다. 남으로 길을 재촉하던 공민왕은 영동 양산면 지금의 누교리에 머물게 되었는데, 영국사의 그 당시 이름은 국청사이기 때문에 왕이 부처님 앞에
나가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의 평안을 빌려고 하였으나, 며칠전부터 내린 폭우로 도무지 내를 건너갈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개울 건너 천태산 쪽에서 종소리가 울려오자 공민왕은 깜짝놀라 좌우를 둘러 보면서 '이 부근에 절이 있는줄은 알았지만 저렇게 종소리가
아름다운 절인줄은 몰랐구나'하고 하자, 왕비와 왕자 그리고 대신들은 하나같이 공민왕을 눈치만을 살피다가, 대신 한 사람이 설명하기를 '저 절은 일찍이
신라 때 원각국사께서 세운 절로써 처음에는 만월사라 하였다가 문종대왕 당시 대각국사가 주지로 온 뒤로 국청사라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하옵니다'하고 아뢰자 공민왕은 눈이 번쩍 띄었다.
'대각국사 의천은 문종대왕의 셋째 아들로 천태종을 일으킨 분이 아닌가? 의천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저 국청사에 올라 국태민안을 빌어보고 싶다'
공민왕의 뜻을 알아 차린 대신들은 산에 올라 칡덩쿨을 걷어 오라 일렀다. 그들은 수행원과 인근 마을주민들이 걷어 온 칡덩쿨을 새기줄처럼 꼬아서
그름다리를 만들었고, 왕비 왕자 그리고 대신들과 함께 완성된 다리를 밟고 국청사 부처님앞에 나아가 국태민안을 빌었다.
그래서 국청사는 공민왕이 다녀간 뒤 왕이 나라안 백성들의 편안함을 빌었다하여 면안할 영, 나라국자를 써서 寧國寺라고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공민왕이 칡덩쿨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간 마을을 누교리(樓橋里)라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자료제공:영동군청 문화체육과)

이날 산행을 마치고 금산 제원에 있는 어죽 한 그릇씩 먹고 귀가할 계획이었었는데, 둘째와 셋째처남이 대전에서 저녁 함께 먹자는 연락이 있어서....
횟집에서 잔뜩...ㅎㅎㅎㅎ